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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의 역사

영등포 전경
  • 면적 : 24.56 ㎢
  • 구목 : 은행나무
  • 행정동 : 18개
  • 구화 : 목련
  • 법정동 : 33개
  • 구조 : 청둥오리
  • 지역특성 : 한강과 안양천 그리고 도림천, 대방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대부분의 지역이 저평한 지역을 형성. 수도권 서남부의 최대 거점도시. 정치, 금융, 언론, 업무의 복합기능지역. 도심과 외곽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영등포구 명칭 유래

영등포(永登浦)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후기 정조 13년(1789년)에 실시, 1790년경 발간한 것으로 추정되는 호구조사 자료집인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입니다. 이후 영등포라는 지명이 통계서가 아닌 정식사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종 13년(1876년), 병자수호조약체결 당시의 수도방위와 관련하여 기술한 고종실록에서 등장합니다. 영등포라는 나루터는 지금의 한강성심병원 건너편 여의도샛강변에서, 지금은 사라진 여의도 옛 양말산을 오가며 한강밤섬과 마포를 연결하는 소규모 나루터로,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에서 실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지도에는 영등포의 ‘영’ 한자가 길 영(永)이 아닌 꽃부리 영(英)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당시 영등포지역이 풍경이 아름답고 문화의 향기가 그윽한 풍류(風流)의 고장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현재의 영등포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등일(靈登日, 음력 2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지금의 여의도샛강변에서 성행하였던 영등굿에서 한자가 변형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永登(영등)'과 물가에 있는 마을을 뜻하는 '浦(포)'가 합쳐져 유래한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또 다른 견해는, 지금의 영등포역 주변으로 추측되는 소머리재(牛頭峴)와 관련하여 여지도서(輿地圖書)의 「멀리 동쪽으로 왕성(王城)을 바라볼 수 있어 궁궐을 사모하는 사람이 의례히 이 재에 오른다.」라는 기록에서 추측컨대 영등포(永登浦)가 되었다는 견해입니다.

선사시대~조선시대 (역사의 주 무대 뒤 평화로웠던 시골촌)

금천현(팔도군현지도) 18세기 중엽 이미지

금천현(팔도군현지도)
18세기 중엽

영등포구는 선사시대 약 7천 년 이전부터 한강변의 일반지역처럼 한강유역 신석기인의 활동무대 중 한 곳으로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50여 개 소국 중 한 곳 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시대의 한강유역은 100여 년간 백제영토에 속했으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으로 70여 년간 율목군 내벌노현에 속하는 등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영등포가 위치했던 한강 이남의 한강하류는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경에 한신주(한주) 곡양헌으로 개명되었으며 고려 태조 23년(940년)에는 금주(衿州)에 속하게 됩니다. 성종 때는 시흥(始興)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었습니다.

금천현(여지도)18세기 중엽 이미지

금천현(여지도)
18세기 중엽

조선시대 태종 14년(1412년)에 이르러 금주는 다시 금주현 ,금과현, 금천현(1414년)으로 바뀌었다가 정조 19년(1795년)에 이르러 시흥헌으로 개명되었으며, 1895년에 다시 경기도 시흥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현재의 영등포구 지역은 조선시대의 시흥헌 하북면(영등포동, 신길동), 상부면(당산동, 문래동, 양평동, 대림동), 양천현 남산면(양화동)에 속하였으며 이때 여의도는 한성부 연희방에 속했습니다.

구한말 이후~해방 전 (영등포역의 출현 이후 급속도로 변모)

과거 영등포역 이미지

1899년 9월 18일 영등포역 개청과 동시에 경인선 개통과 1904년 경부선의 개통을 계기로 이곳의 주민왕래가 급증하는 한편, 1910년 시흥군청이 시흥현 하북면 영등포리로 이전하면서 이 일대가 새로운 교통 · 상업 · 공업의 중심지로서 급속도로 성장,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의 전국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현 영등포 지역이 경기도 시흥군 북면 영등포리, 당산리, 도림리, 양평리, 신길리와 시흥군 양동면 양화리 고양군 용강면 여울리(여의도)로 재편성되었으며, 1917년 이 중 영등포리가 1917년에 영등포면으로 승격되어 영등포리, 당산리, 양평리를 관할하고, 1931년에는 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1973년 영등포구의 위치도

1973년 영등포구의
위치도

1936년 4월 1일 일제는 경성부의 구역을 크게 확장하였습니다. 동부, 서부, 영등포의 3개 출장소를 설치하고 영등포 출장소 관할 하에, 현 영등포구에 속하는 영등포정, 여의도정, 당산정, 도림정, 양평정, 양화정, 신길정으로 재편하였습니다. 단, 대림정은 당시에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도림리에 속하였습니다.
1943년 6월 10일 일제는 경성부의 구제 실시로 서울지역을 7개 구로 나누었습니다. 이 때 영등포출장소를 폐지, 영등포 구역소를 설치하고 “영등포구”란 행정구역명을 최초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영등포구의 관할 동은 영등포정, 여의도정, 신길정, 도림정, 당산정, 양평정, 양화정, 신길정, 동작정, 흑석정, 본도정, 노량진정, 상도정, 번대방정으로 확대되었으며, 여의도 중 율도정(밤섬)의 작은 섬은 지금의 마포구로 편입되었습니다.

해방 후 ~현재 [서울 서초. 동작. 관악. 강서. 양천. 구로. 금천 7개 구의 모체]

영등포구 이미지

영등포구는 1963년 1월 1일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 편입을 계기로 영등포구 관내에 신동 · 관악 · 오류 · 양동 · 양서 5개 출장소를 두었습니다. 또한, 경기도에서 서울시로 신규 편입된 지금의 서초동 · 사당동 · 봉천동 · 공항동 · 목동 · 개봉동 · 시흥동까지 관할하는 등 확대일로를 걷습니다. 당시의 영등포구는 현 강남구 · 강동구 · 송파구를 제외한 한강이남 서울 대부분을 포함, 면적이 208㎢(시 전역의 34.4%), 인구 132만여 명(시 전체의 22.6%)으로 서울시 전체에서 영등포구가 가장 광활하며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했습니다.

1968년 여의도 신시가지 섬 조성을 선두로 1970년대에 들어서 서울 강남개발붐이 일어나면서 영등포구에서 1973년 7월 1일 관악구, 1977년 9월 7일 강서구, 1980년 4월 1일 구로구가 분리됩니다. 이후 1975년 10월 1일 관악구에서 동작구와 강남구(일부)가 다시 분리되었으며, 1988년 4월 1일 강남구와 강서구에서 다시 서초구와 양천구가, 1995년 4월 1일 구로구에서 금천구가 분리되면서 영등포구는 서초구 · 동작구 · 관악구 · 강서구 · 양천구 · 구로구 · 금천구 7개 구의 모체로서, 해방 후 서울에서 지역분할이 가장 많았던 구였습니다.